문화원 소개

KOREAN CULTURAL CENTER

  • 문화원 소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한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대륙문화와 해양문화를 모두 수용하고 자연조건에 순응하면서 독창적이면서도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문화를 형성했다.


한국의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 모든 예술에는 전통과 현대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건축, 의복, 음식 등 의식주를 비롯한 다양한 생활양식도 마찬가지다.


경주역사유적지구-경주는 천여 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으며, ‘벽과 지붕이 없는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사진은 신라 고분군의 전경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경주는 천여 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으며, ‘벽과 지붕이 없는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사진은 신라 고분군의 전경이다.


한국의 문화예술은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젊은이들이 국제콩쿠르 무대를 휩쓰는가 하면 많은 문학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해외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한국 화가들의 단색화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미술품으로 급부상했다.


K-Pop의 열기는 2020년 8월, 남성 그룹 BTS의 영어 싱글 곡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 1위에 오르면서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아시아 가수가 핫 100 1위에 오른 것은 1963년 이래 처음이며, 한국 가수로서는 최초다. 이 기록은 특정 그룹의 쾌거라기보다 그동안 일본, 중국, 동남아를 거쳐 미국과 남미, 유럽 등 전 세계로 확산되어 온 K-Pop의 인기를 반영하는 결과물이다. 유튜브가 대중화되면서 여성 그룹 블랙핑크 등 K-Pop 스타의 뮤직비디오가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문화의 예술적 우수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삼국시대의 고분벽화와 유물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인의 독창적인 예술적 감성이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졌으며, 조상들의 이런 예술적인 감성의 DNA가 현재의 한국인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의 문화예술 유산 가운데 상당수는 유네스코 보호 대상으로 등재되었다. 2020년 현재 세계유산, 세계기록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으로 등재된 건은 모두 50건이다.


유네스코 등재유산


세계유산


창덕궁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창덕궁은 조선 시대(1392~1910) 옛 궁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유적이다. 1405년에 별궁으로 완공되었지만, 정궁이던 경복궁이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전부 타버리고 1867년 중건되기까지 조선의 왕들은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창덕궁 인정전 - 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 및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주요한 국가적 의식이 치러진 곳이다.


창덕궁은 조선 시대에 지어졌으나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자연지형에 맞춰 산자락에 지어졌다. 대부분의 궁궐이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건축되는 것과 달리, 창덕궁은 자연조건을 살려 북악산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모양에 맞게 궁궐을 기능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했다.


정문인 돈화문을 비롯해 인정전, 선정전 등 당시의 여러 건물이 고스란히 남았고, 한국의 전통정원인 비원까지 딸린 훌륭한 역사유산이다. 궐에 위치한 낙선재는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종묘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 등 모두 83위의 신주(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의지할 수 있는 상징물)를 모시는 조선왕조의 사당이다.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한 조선은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을 중요시하였는데 국가 차원에서 유교 이념을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종묘-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이다.

종묘-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이다.


전체적으로 대칭 구조이며 신주를 보관하는 건물인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가 위계에 따라 다르게 되어 있다. 16세기 이래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 공간으로 가치가 있다. 이곳에서는 이들의 넋을 기리는 종묘제례가 정기적으로 거행된다.


화성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위치한 화성은 1796년 조선 정조 임금 때 건립된 전체 길이 5.7km의 성곽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이 근처로 옮기면서 성을 쌓도록 했다.


성곽의 구조가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보통 성곽과 달리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갖춰 문화재로서 높게 평가받는다.


실학자인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개발한 거중기(움직도르래를 이용, 낮은 곳의 돌을 쌓는 데 사용)와 녹로(고정도르래를 이용, 크레인처럼 돌을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데 사용) 등 과학적 기구를 동원하여 성을 완공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석굴암·불국사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에 위치한 석굴암은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석굴 사찰로 774년 완공됐다. 뛰어난 조각기법이 발휘된 작품으로 동해에 떠오르는 해의 빛이 석굴암까지 깊숙이 들어와 부처의 이마를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석굴암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불국사는 사찰의 전체적인 배치가 뛰어나며, 대웅전 앞마당에 나란히 서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특히 돋보인다. 두 탑 모두 신라 양식을 표현하면서도 석가탑은 단순하지만, 다보탑은 정교하고 화려하다.


1. 화성 - 동서양의 군사시설 이론을 잘 배합한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2. 불국사 - 불교 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사례이다. 사진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이다. 3. 석굴암 - 높다란 연화좌대에 앉아 있는 석굴 안 본존불과 그 옆모습

1. 화성 - 동서양의 군사시설 이론을 잘 배합한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불국사 -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사례이다. 사진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이다.
3. 석굴암 - 높다란 연화좌대에 앉아 있는 석굴 안 본존불과 그 옆모습


다보탑은 화강석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 탑을 쌓은 형태로 한국의 석탑 중에서도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 한국의 10원짜리 동전에 다보탑이 새겨져 있다. 장식을 생략한 채 구조적인 비례에 따라 완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석가탑은 한국 불교 석탑의 원형으로 여겨져 이후 비슷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불국사의 대웅전으로 오르는 청운교(푸른 구름다리)와 백운교(흰 구름다리)도 조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극락정토에 들어가려면 물을 건너고 구름을 지나야 한다는 종교적인 상징성도 내포하고 있다.


조선 왕릉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홍유릉 등은 조선 시대의 왕릉이다. 모두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구리시, 고양시, 남양주시 등에 있다. 조선 시대의 왕과 왕비의 무덤은 모두 44기며, 이 가운데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 동구릉 - 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와 후비가 안장된 9능이 있다., 2.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 3. 목릉 -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능

1. 동구릉 - 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와 후비가 안장된 9능이 있다.
2.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
3. 목릉 -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능


왕릉은 유교 사상과 풍수지리 등 당시의 가치관이 압축된 장묘문화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 왕릉이 훼손되지 않은 채 원래 모습대로 보존돼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해인사 장경판전


고려대장경 경판들은 해인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장경판전에 보관돼 있다. 1488년 완성된 장경판전의 건축에는 원활한 실내 통풍과 방습으로 목재 경판의 부식을 막기 위해 과학적이고 독특한 방식이 사용됐다.


대장경판이 보관된 장경판전은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해발 700m 지점에 지어졌다. 건물은 네 방향으로 각각 마주 보도록 설계돼 통풍이 원활하다. 가야산 지형의 특성상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자연 환기가 가능하다. 벽면의 위아래, 건물의 앞뒷면의 살창 크기를 다르게 해서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 아래위로 돌아 나가도록 만들었다. 공기가 대류 되도록 하고 적정 온도를 유지해주는 이 살창은 우수한 과학적 건축기술을 잘 보여준다. 건물 바닥은 땅을 깊게 파고 숯, 찰흙, 모래, 소금, 횟가루 등을 뿌렸는데, 이는 비가 많이 오면 습기를 빨아들이고, 가뭄이 들면 습기가 올라오도록 자동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무석인, 왕릉을 지키는 석물

무석인, 왕릉을 지키는 석물


조선 왕릉의 무덤은 돌판으로 보호되고 주위에 난간이 둘렸으며, 그 앞에는 온순함과 사나움의 상징인 양과 호랑이 형상의 돌 조각상이 배치돼 있다. 왕릉 정면에는 영혼이 나와서 먹고 놀 수 있는 직사각형의 돌 받침이 놓였고, 좌우에 멀리서도 보이도록 8각형의 높은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동물 조각상 앞에는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만든 돌등이 세워졌고, 동·서·북쪽 삼면은 담을 쌓았다. 돌등 좌우에는 한 쌍 또는 두 쌍의 돌로 만든 문관조각상이 마주 서 있고, 그 뒤에 말 조각상이 배치됐다. 문관조각상 아랫단에는 무관(군인) 조각상이 같은 방식으로 세워져 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672년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6년 조선 인조 임금 때 대대적으로 수축됐다.


남한산성-통일신라에서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 기간의 단계별 축성술 발전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다.

남한산성 - 통일신라에서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 기간의 단계별 축성술 발전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하였으며, 둘레가 약 12.3km에 이른다. 산 위에 도시가 형성되어 조선 시대 기록에서 보면 약 4,000명 정도가 남한산성에 거주했으며, 비상시에는 왕실과 군사 지휘부가 대피할 수 있는 임시수도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도성의 성격을 갖추기 위해 행궁을 비롯한 종묘와 사직단이 1711년 숙종 임금 때 조성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은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주치-모모야마 시대), 중국(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로 파악된다. 이 기간 서양의 화포 도입으로 무기 체계가 변화함에 따라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 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시대별 성곽 축성술의 변화 과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700여 년간 존재한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 등 3개 시군 8곳의 문화유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부 등재지역을 살펴보면, 충청남도 공주시는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등 2곳, 충청남도 부여군은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나성 등 4곳, 전북 익산시는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 2곳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5-7세기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의 교류와 그 결과로 나타난 건축기술의 발전과 불교의 확산을 보여주는 고고학 유적이다. 또한 수도의 입지, 불교 사찰과 고분군, 건축물과 석탑을 통해 한국의 고대왕국인 백제의 문화, 종교, 예술미를 보여준다.


공산성 - 금강변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산성으로,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 시대 이후에 공산성이라고 불렸다.

공산성 -금강변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산성으로,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 시대 이후에 공산성이라고 불렸다.


송산리고분군 -웅진시대(475~538) 백제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 1~6호분까지 7기가 복원되어 있다

송산리고분군 -웅진시대(475~538) 백제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 1~6호분까지 7기가 복원되어 있다.


정림사지 -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5층 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 -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5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한국의 서원


서원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도입돼 조선 시대에 크게 꽃피운 학문인 ‘성리학’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다. 대부분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사이에 설립되었으며, 한국 중부와 남부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세워진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등 9개 서원은 오늘날 한국의 성리학과 교육문화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서원을 이끄는 사람들은 각 서원이 위치한 지역의 지식인들로, 그들 덕분에 조선 시대는 서원 중심으로 문화가 발전하고 번성했다. 지식인들은 서원을 통해 후학들이 학습에 매진할 수 있는 교육체계와 유형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서원의 핵심 기능인 학습과 상호 교류적인 특성은 건물의 배치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에 지어진 서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용자례'- 초성, 중성, 종성별로 당시 국어의 예를 94개 단어로 제시한 부분

훈민정음 해례본의 '용자례'
초성, 중성, 종성별로 당시 국어의 예를 94개 단어로 제시한 부분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


한글은 독창적인 글자로 사용하기에도 간편하다. 다른 나라 글자들과 달리 발성 기관을 본떠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과학적이다. 세종대왕이 1446년에 한글을 반포했을 때 공식 명칭은 훈민정음이었다.


같은 해 학자들은 왕명에 따라 훈민정음 해설서를 만들었는데, 이 책의 제목도 훈민정음이므로 둘을 구분하기 위해 해설서를 ‘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도 한다. 한글을 창제한 목적과 원리 등이 상세히 설명된 훈민정음해례본은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배우기 쉽고 쓰기도 간편한 한글이 반포된 후에야 비로소 하층민과 여자들도 글을 익히고 사용할 수 있었다. 한글은 반포 당시에는 모두 28개 글자였으나 지금은 24개만 쓰인다.


조선왕조실록


1392년부터 1863년까지 472년 동안 조선 시대 임금과 신하들의 행적 및 정책과 관련된 사실들을 시간순으로 기록한 역사기록이다.


모두 1,893권 888책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 등에 보관돼 있다. 실록 편찬은 주로 임금이 타계하고 다음 임금의 즉위 초기에 이뤄졌으며, 사관이 수시로 작성해두었던 사초를 기본 자료로 활용했다.


왕실의 동향은 물론,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실록이 완성되어 일단 사고에 보관되면, 누구에게도 열람이 허용되지 않았다.


왕실의 제사나 외국 사신 접대 등 중요한 행사가 열릴 경우에만 과거의 사례를 참고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그 내용의 일부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는 원래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 등 4곳에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후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강화도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해 실록을 보관했다.


일성록-1760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후기 왕의 활동과 국가 행정의 모든 측면을 매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연대기이다.

일성록 - 1760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후기 왕의 활동과 국가 행정의 모든 측면을 매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연대기이다.


승정원일기


1623년 3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매일 처리한 문서와 사건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역대 임금의 명령은 물론, 각 관청의 보고와 상소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총 3,243권에 이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일성록


조선 후기 왕의 활동과 국정 운영을 기록한 연대기이다. 왕의 처지에서 기록한 일기체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 공식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1760년(영조 36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151년간의 기록이 총 2,32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8~20세기 조선 내부의 정치 활동부터 동서양의 정치·문화적 교류의 구체적 모습과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까지 담고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조선, 18세기) - '가례'는 왕실의 큰 경사를 의미하는데 특히 '가례도감의궤'는 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을 정리한 기록을 말한다. 사진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인 정순왕후의 혼례를 기록한 의궤의 일부이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조선, 18세기)
'가례'는 왕실의 큰 경사를 의미하는데 특히 '가례도감의궤'는 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을 정리한 기록을 말한다. 사진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인 정순왕후의 혼례를 기록한 의궤의 일부이다.


조선왕조 의궤


조선 시대 왕실에서 거행된 여러 가지 의례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보다 내용이 자세하며 임금의 행차 모습 등이 그림으로도 표현되어 더 사실적이다.


왕비와 세자의 책봉과 혼례를 비롯해 왕실의 장례, 왕릉의 조성과 이장 등 제례가 주요 내용이지만, 임금이 모범을 보이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이나 궁궐 건물의 신축과 보수 등의 경우에도 의궤가 편찬되었다. 정조 임금 때 화성 성곽 축성과 수원 행차를 담은 상세한 의궤가 작성된 것이 그중 하나다.


의궤는 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사고에 보관되었는데, 조선왕조 초기의 의궤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됐다. 다행히 그 이후 제작된 총 3,895권에 이르는 방대한 의궤가 남아 있다.


또한 1866년 프랑스군이 반출해 그동안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이 의궤는 한국 정부와 학계의 지속적인 반환요청으로 2011년 영구임대 방식으로 모두 반환됐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경판들로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 기록물이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경판들로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 기록물이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고려 시대(918~1392)인 1236년부터 15년간에 걸쳐 불경을 나무에 새긴 경판이 고려대장경판이다. 경판의 수가 총 8만 1,258개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경판마다 양면에 새겨져 있다.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의 해인사에 보관돼 있다. 해인사는 802년에 지어진 불교 사찰이다.


고려대장경판은 몽골의 침입으로 국난에 처한 고려가 불교의 힘으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작됐다. 고려대장경판은 중국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때 새겨진 다른 대장경판과 비교할 때 불교 내용이 훨씬 풍부하며, 경판이 온전히 보존된 값진 세계문화유산이다. 고려대장경판 제작은 한국의 인쇄와 출판 기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한국 광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 요구 운동으로, 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을 확산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당시 시민들의 일련의 활동과 이후에 이 사건의 피해자 보상과 관련해 기록되고 생산된 문건, 사진, 영상 등의 자료를 총칭하는데, 등재 기록물은 5·18 기념재단, 국가기록원, 육군본부, 국회도서관, 미국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종묘제례악 일무(佾舞) 중 무무(武舞)-종묘제례악에서 추는 춤을 일무라고 하는데 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2종류로 나뉜다. 문무는 정적이면서도 부드럽게 추는 문인 취향의 춤인 반면 무무는 강하고 힘차게 추는 무인적 성격을 지닌 춤이다.

종묘제례악 일무(佾舞) 중 무무(武舞) - 종묘제례악에서 추는 춤을 일무라고 하는데 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2종류로 나뉜다. 문무는 정적이면서도 부드럽게 추는 문인 취향의 춤인 반면 무무는 강하고 힘차게 추는 무인적 성격을 지닌 춤이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행하는 조선왕조의 정교한 기념 의식으로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거행된다. 종묘제례는 조선 왕실에서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는데 유교가 국가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 시대에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통해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고 사회적 유대감과 질서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종묘제례와 더불어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기 위하여 연주되는 기악(樂)과 노래(歌)·춤(舞)을 종묘제례악이라 하는데, 타악기, 현악기 등 다양한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과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무용을 통해 중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의식과 음악이 어우러져 500년 이상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온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가 소리, 아니리, 발림으로 긴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고수는 추임새를 하며 북 장단으로 반주하는 극 노래이다. 18세기부터 현대까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예술 음악으로 발달해왔다.


판소리 -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 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창), 아니리(말), 발림(몸짓)을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이다.

판소리 -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 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창), 아니리(말), 발림(몸짓)을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이다.


강릉단오제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으면서 전통 민속축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축제이다. 매년 단오(음력 5월 5일)를 앞두고 강원도 강릉에서 30여 일간 진행된다.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하며 지역주민이 화합하고 단결하는 협동 정신을 볼 수 있다.


강릉단오제-음력 4월부터 5월 초까지 영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통축제이다. 사진은 강릉단오제 중 관노가면극 공연 모습

강릉단오제- 음력 4월부터 5월 초까지 영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통축제이다. 사진은 강릉단오제 중 관노가면극 공연 모습


단오제는 음력 4월 5일 신에게 바칠 술을 빚으면서 시작된다. 이를 ‘신주담기(신주근양)’라고 하는데 천상과 지상의 영혼을 연결하는 음식으로 술은 곧 신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이 밖에 관노들이 춤과 몸짓으로 놀았던 한국 내 유일의 무언 가면극인 관노가면극을 비롯하여 그네뛰기, 씨름, 농악 경연대회, 창포물에 머리 감기, 수리취떡 먹기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특히 창포물에 머리 감기는 여자들이 단옷날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뜻에서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는 세시풍속이다.


강강술래


전라남도의 해안 지역 일대에서 추석이나 정월대보름에 주로 부녀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노래, 춤과 놀이가 혼합된 민속놀이이다. 현재는 예술적으로 발전하여 전국에서 민속공연으로 행해진다. 야외의 넓은 공간에 모여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추는 집단 무용을 기본으로 하고 중간에 ‘남생이놀이’, ‘덕석몰이’, ‘고사리꺾기’ 등 여러 놀이가 삽입된다. 강강술래의 노래는 한 사람이 메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합창으로 받는데 처음에는 느린 진양조의 가락으로 부르다가 점차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빨라지며, 춤 동작도 여기에 맞추어 변한다.


남사당놀이


남사당놀이는 일종의 유랑 악단인 남사당패가 장터와 마을을 돌며 펼치던 풍물놀이, 줄타기, 대접 돌리기, 가면극, 꼭두각시놀음 등의 공연이다. 주로 농부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한국 고유의 민속 연희다.


북, 장구, 꽹과리, 징, 나발, 태평소를 연주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김매기·논매기·모심기 등의 힘든 일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올리고 피로를 덜며 협동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데서 비롯됐다.


영산재


사람이 죽은 지 49일이 되는 날 영혼의 극락왕생을 위해 행하는 불교의식이다. 고려 시대부터 전승되어왔으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아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산재의 목적이다. 일방적인 공연이 아닌 대중이 참여하는 불교 의식으로서 가치가 있으며, 제사 의례뿐만 아니라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봉행되기도 한다.


1. 남사당놀이-꼭두쇠(우두머리)를 비롯해 최소 40명에 이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연예인인 남사당패가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조선 후기부터 연행했던 놀이이다. 2. 영산재-49재(사람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의 한 형태로, 영혼이 불교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극락왕생하게 하는 의식이다.

1. 남사당놀이 - 꼭두쇠(우두머리)를 비롯해 최소 40명에 이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연예인인 남사당패가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조선 후기부터 연행했던 놀이이다.
2. 영산재 - 49재(사람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의 한 형태로, 영혼이 불교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극락왕생하게 하는 의식이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v제주도 지역의 전래 마을 굿의 하나로 풍어와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음력 2월을 영등달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에 바람의 신인 영등 할머니가 마을과 집안에 들어와 떠돌다가 보름날에 나간다고 여기는 민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


택견


한국 전통무예의 하나로 각희(角戱)‧비각술(飛脚術) 등으로도 불리는 택견은 ‘차기’라는 뜻을 가지며 고문헌에는 ‘탁견’으로 나온다. 태권도와는 역사적, 기술적으로 다른 별개의 무예이다.


택견의 특징은 손‧발과 몸동작이 근육의 움직임과 일치해 유연하고,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수 있는 무술이라는 것이다. 또한 음악적이며 무용적인 리듬을 갖고 있어 예술성 짙은 무예로 평가받는다. 다른 무예와 비교하면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고 발을 많이 움직이는 편이다.


경기 방법은 간단하다. 경기자가 각각 상대방을 향해 한쪽 발을 내딛는 대접(待接)의 상태에서 손발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넘어뜨리거나 얼굴을 발로 차면 이긴다.


줄타기


광대가 줄을 타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재담을 늘어놓는 놀이이다. 줄광대가 줄 위에서 재주를 부릴 때, 밑에서는 어릿광대가 익살을 부리며 분위기를 띄운다. 한때는 궁중에서 새해의 평안을 기원하던 나례나 외국 사신을 영접하는 잔치 등에서도 행해졌으나, 점차 마을이나 장터의 서민 놀이로 바뀌었다. 부잣집의 환갑잔치나 생일잔치 등에서도 선보이곤 했다.


한국의 줄타기는 외국의 줄타기와 달리 줄만 타는 몸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노래와 재담을 곁들여 줄 타는 사람과 구경꾼이 함께 어우러진 놀이판을 이끄는 특징이 있다.


1. 택견-유연한 몸동작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기 몸을 방어하는 한국 전통 무술이다. 2. 줄타기-줄만 타는 몸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노래와 재담을 곁들여 줄타는 사람과 구경꾼이 함께 어우러져 놀이판을 이끈다.

1. 택견 - 유연한 몸동작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기 몸을 방어하는 한국 전통 무술이다.
2. 줄타기 - 줄만 타는 몸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노래와 재담을 곁들여 줄타는 사람과 구경꾼이 함께 어우러져 놀이판을 이끈다.


매사냥


야생의 매를 조련해 꿩이나 토끼를 잡는 사냥놀이이다. 한반도에서는 수천 년 전 시작돼 고려 시대(918~1392)에 가장 성행했으며, 지역적으로는 북쪽에서 더 유행했다. 시기적으로는 음력 10월부터 겨울철을 지나 봄 농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매의 발목에는 가죽 끈을 메고 꼬리에는 길들인 주인 이름을 기재한 시치미와 방울을 달았다. 방울의 용도는 꿩을 잡아 땅으로 내려앉은 매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2010년 몽골, 프랑스, 체코, 스페인, 시리아 등 모두 11개 나라와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됐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라는 노랫말로 한국 민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의 영어 악보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라는 노랫말로 한국 민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의 영어 악보


아리랑


아리랑은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민요이다. 하나의 곡이 아니라 지역마다 다양한 버전으로 전승되고 있다. 현재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는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른다.


아리랑은 여러 세대를 거쳐 국민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노래이다. 누구나 새로운 가사와 멜로디를 지어낼 수 있기 때문에 지역 특색에 맞게 다양한 버전으로 전승되어왔다. 가장 유명한 아리랑은 강원도 지역의 ‘정선 아리랑’, 전라남도 지역의 ‘진도아리랑’ 경상남도 지역의 ‘밀양아리랑’이다. 지역마다 가락과 가사가 다르지만 모든 노래에 여음구에 ‘아리랑’, ‘아라리’ 같은 비슷한 구절이 들어간다.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는 만큼 노래 내용도 다양하다. 농사일의 고충을 달래는 노동요, 이성 간에 마음을 전하는 사랑 노래, 풍요를 기원하는 노래, 즐거울 때 흥을 돋우는 유희요 등 노래를 부르는 상황과 목적이 무궁무진하다. 한 가지 공통점은 국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아리랑의 특징은 한국문화의 다양성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아리랑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에서 한국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경기장에 입장할 때 아리랑을 불렀고, 2002년 제17회 한일 월드컵 경기 시에는 응원단체인 ‘붉은악마’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응원가로 아리랑을 불렀다.


김장문화


김장은 한국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월동 준비로 겨우내 먹어야 할 김치를 대량으로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김치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로 한국인의 밥상에는 주요 반찬으로 항상 등장한다. 따라서 김장은 한국인의 겨울나기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김장을 하기 위해서는 꼬박 1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야 한다. 봄에는 각 가정에서 새우젓, 멸치젓 등 다양한 해산물 젓갈을 준비한다. 여름에는 천일염을 준비하고 늦여름에는 고추를 말려 고춧가루를 빻아 놓는다. 늦은 가을과 초겨울에 본격적인 김장 시기가 되면 준비한 재료로 가족 단위에서부터 마을 단위 등 공동체별로 다 함께 모여 김치를 담근다.


김장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기 때문에 한국의 공동체 문화와도 관련이 깊다. 따라서 김장 문화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현대의 한국인들이 연대감을 강화하고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온 한국의 나눔 문화를 상징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김장 문화는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2013년 12월 5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